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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치과의사협회지

협회지 목록

제49권 11호2011.11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

  • 작성자신재의

투고일:2011. 11. 4         심사일:2011. 11. 17         게재확정일: 2011. 11. 24

 

큰 스승  박명진(朴明鎭)

 

신재의 치과의원(은퇴)
신 재 의

 

ABSTRACT

Respectable Leader, Dr. Park Myoung-Jin

Shin Jae Eui Dental Clinic(Retired)
Shin Jae Eui, D.D.S.,M.S.D.,Ph.D

Park Myoung Jin (1903-1957) was a respectable leader who disseminated dental medical education to make our path as the leading dental medical education developing a new global history of dental medicine.
Dr. Park was born in Seoul on 3 July 1903. He graduated Kyongseong dental medical school and studied at the pharmacology department achieving his M.D. 
In 1938, as the president representing the Hanseong dentists association equivalent to the Japanese dentists association, Dr. Park participated in various events.
After liberation, Dr. Park tried his best to achieve Korean dental medical education as the pursuit of ideal ego with self-centered ego.
He reorganized the Kyongseong dental medical school and incorporated it to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dental college. 
Even during the Korea war, Dr. Park still sincerely carried out his duties as the director of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dental medical college by recruiting university entrants and turned out graduates.
In 1954, Dr. Park as the director of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dental medical college, he frontiered an opportunity to adapt the American dental medicine by sending school staffs to study overseas.
On 25 June 1954, Dr. Park received 25 years of meritorius service award presented by Seoul National University Dental Medical College.  Further, on 6 Aril 1954, Dr. Park became a member of an academic research committee.
In April 1946, Dr. Park was elected as the president of the Chosun Dentists Association(Korean Dental Association).
On 19 May 1947, Dr. Park was also appointed as the director of the Korea dental medicine association leading the general meetings and academic conferences from 2nd through the 8th sessions.  
On 30 November 1954, as the president of the Korea dental medicine association, Dr. Park also published the Korea dental association publications.
In 1957, Dr. Park donated the school housing for the principle of the Kyongseong dental medical school establishing the basis for the Korea dentists association center. 
Dr. Park also participated in establishment of the oral hygiene campaigne, dental administration policy, organization of the specialized subject delegation board members and the dental materials association.
On 10 December 1955, we can recognize Dr. Park? respective historical consciousness through his declaration ?istory is a true record of historical traces of a national?
Dr. Park was a living witness of the Korean dental industry. Especially, he stated that the origin of the Korean dentists association was in the Hanseong dentists association.
Dr. Park overcame the pressure and indignity during the Japanese colonization. The joy of liberation did not last long since he also had to experience the fraticidal tragedy of the Korea war.
Dr. Park was a professional dental specialist and a leader researching dental medicine. He was a great leader who understood the dental medicine and dedicated for the dentist association and dental medicine association with compassion for the nation and national as a Korean.

 

 

1. 머리말


근대치의학은 외국인들에 의하여 소개되었다. 1885년 미국인 의사 알렌(Horace N. Allen)이 제중원에서 발치를 행한 것이 처음이었다. 1897년 서양인 치과의사로 처음 한국에 온 사람은 라빈손(Robinson)이다. 특히 1903년 11월 미국인 치과의사 소어스(Sauers)는 국왕인 고종황제의 보철치료를 행함으로서 일반 백성들의 의식의 전환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1). 
1893년 7월 일본인 치과의사 노다 오지(野田應治)는 인천과 서울에서 개업을 하였다. 그는 구강영역의 질환이나 치아 보철을 하면서 질병 예방법도 소개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인 입치사는 일제의 장려로 인해 일본에서 한국에 이사하여 치과의사의 수배에 달하였다2).
한국인 입치사는 치과의사보다 먼저 등장하였다. 1907년 최초의 한국인 입치사는 최승룡이었다. 1912년 최초의 한국인 치과의사 함석태가 배출되었다. 그 후 몇 명의 치과의사가 등장하였고, 치과교육기관도 생기게 되었다3). 
박명진(朴明鎭)은 1928년 4월 8일 경성치과의학교를 졸업하고, 전문학교가 되자 편입하여 1930년 4월 26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치과의사였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 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재직하면서, 1943년 박명진은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명진 약력 
1903년 7월 3일 서울시 양교동(量橋洞)에서 박기붕(朴其鵬)의 장자로 출생
1920년 중앙중학 졸업
1925년 4월 경성치과의학교 입학
1928년 4월 8일 경성치과의학교 제4회 졸업
1928년 5월 10일 조선총독부의원 의무부수 치과부 근무
1928년 6월 15일 관제개정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수 부속의원 치과부 근무
1928년 11월 5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수 부속의원 치과부 의원 면직
1928년 11월 6일 경성치과의학교 부수 부속의원 치과부 의원 근무
1929년 5월 10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4학년 편입
1930년 4월 26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졸업
1930년 4월 28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조수
1934년 10월 10일 경성제국대학 약리학교실에서 연구(지도교수 柳樂達見, 杉原)
1937년 12월 16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조교수
1938년 한성치과의사회회 회장 
1940년 경기도치과의사회 부회장
1943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1943년 서울 종로 3정목에서 개업
1945년 11월 1일 경성치과대학 학장
1946년 9월 1일 - 1957년12월27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장
1946년 4월 보건후생부 치과의사 자격 심사위원회 위원 
1946년 8월 조선치과의사회 위원장
1947년 조선치과의학회장, 국가시험심의회 위원
1948년 7월 서울대학교 평의원회 위원 피선
1950년 육군군의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소위임명
1951년 서울대학교 대학위원, 보건위원회 및 국가시험의회위원 피임
1954년 근속25주년 근속표창
1954년 학술원위원에 피선
1957년 12월 27일 서거
1957년 12월 31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금곡선영에 안장되었다. 
1958년 5월 10일 대한치과의사회 제7회 정기총회는 1957년 12월 27일 서거한 박명진에 대한 묵념을 하고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다.

 

1928년부터 1957년까지 박명진은 30년을 치과의사로 살면서 치과의사회 회장, 치과의학회 회장과 치과대학 학장을 지냈다. 때문에 그에 관한 기록은 치과의사협회사와 치과대학사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와 『대한치과의사협회사』2010, 『서울대학교치과대학사』 1922-1991와 『서울대학교치과대학사』제2권 1922-2001가 주 자료가 되었다.


활동한 내용에 비하여 박명진이 남긴 기록은 많지 않았다. 그의 논문은 《경성치과의학회잡지》, 《만선지치계》, 《일본의학집보 약물학》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가 남긴 기록은 세계창조의 주인공으로서 역할을 다하도록 우리의 진로를 인도하라는 글 〈대변자의 역할을 완수하라〉4)와 우리 치의학 발전이 되기를 바라는 글 〈대한치과의학회지 발간호 권두사〉5), 역사(歷史)라 함은 그 민족이 걸어 온 역적(歷蹟)을 거짓없이 적어 놓은 것이라 말하며, 학문(學問)에서 정당한 이론과 학설이 새로운 연구발전에 기초가 되고, 그릇된 이론과 착오있는 판단도 새 연구 진행에 자극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우리의 기록〉6)과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한국치의학의 과거, 현재를 기술한 글 〈한국의 치과의학〉7)이 있다.


《조선의보(朝鮮醫報)》의 기록은 박명진이 한성치과의사회의 임원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8) 《만선지치계(滿鮮之齒界)》에서는 박명진이 학위받은 사실과 활동한 한성치과의사회가 조선연합치과의사회에 가입한 사실과 일제의 강압으로 해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였다9). 
박명진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시도된 바가 없다. 박명진은 일제강점기 후반인 1928년부터 광복 후 6.25동란 수습기인 1957년까지 치과의사로서의 삶을 살아가신 분이다. 때문에 일제의 압박과 굴욕을 참아내셨고, 광복의 환희도 잠시 6.25동란의 동족상쟁의 아픔도 겪어야 하였다. 
박명진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치과의사라는 전문 직업인으로 치의학을 연구하며, 교육한 스승이었다. 그는 한국인으로 나라와 동포를 사랑하는 바탕 위에 치과의사라는 전문 집단의 상황을 파악하고 치과의사회와 치과의학회에서 활동한 지도자였다.
저자는 박명진을 출생과 교육, 치의학을 연구한 학자와 치의학을 가르친 교육자, 전문 집단인 치과의사회와 치과의학회의 상황을 파악하고 지도한 지식인으로 살펴보려 한다. 


2. 일제강점기


가. 출생, 교육, 약리학자

 

박명진(朴明鎭, 1903∼1957)은 1903년 7월 3일 서울시 양교동에서 박기붕(朴其鵬)의 장자로 출생하였다10). 1920년 중앙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1925년 4월에 경성치과의학교에 입학하고, 1928년 4월 8일에 졸업하였다11). 
졸업 후 1928년 5월 10일 조선총독부의원에 의무부수로 치과부에 근무하였고, 1928년 6월 15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수, 1928년 11월 6일 경성치과의학교 부수에 임명되었다. 1929년 4월 15일 경성치과의학교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로 되자, 그는 1929년 5월 10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편입하였고, 1930년 4월 26일 4학년 과정을 마치고,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본과 1회 졸업생이 되었다. 1930년 4월 28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조수가 되었다12). 1928년, 1931년 박명진은 경성치과의학교 일원으로 조선치과의학회 학술강연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13). 
박명진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조수가 된 후 연구에 힘을 다하였다. 1934년 10월 10일 경성제국대학 약리학교실에서 연구하고(지도교수 柳樂達見, 杉原), 1937년 12월 16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1943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수여 받았다. 1943년 박명진은 서울 종로 3정목에서 개업을 하기도 하였다14).
박명진의 박사학위 주 논문 1.은 “창연제와 연제 투여 집토끼의 구강 내 기관에 의한 창연과 연 침착에 관한 분광경적 검색에 대하여(독문)”이다. 주 논문 2.은 “아드레날린, 피로갈핀 및 아트로핀 투여한 집토끼의 연제투여 후의 구강내 기관에 의한 연 침착에 관한 분광경적 검색에 대하여(독문)”이다.

 

1932년 이후 1942년까지 박명진의 경성치과의학회 발표 연제 11개와 12편의 논문을 게재한 잡지 목록이다.
경성치과의학회 발표 연제
1932년 10월 30일 경성치과의학회, 연속주조의 응용에 대하여, 박명진
1933년 9월 23, 24일 경성치과의학회, 구개용적과 치궁과의 관계, 박명진
1934년 9월 23, 24일 경성치과의학회, 보철장치의 수학적 관찰, 박명진
1935년 9월 22, 23일 경성치과의학회 
아비산이 지각신경 및 운동신경에 미치는 작용의 추보, 박명진
1936년 9월 22, 23일 경성치과의학회
2, 3의 지속적 해열작용을 갖는 약물의 진통작용에 대하여, 박명진
아비산의 약리작용에 대한 일고찰, 박명진, 矢尾太郞
1938년 9월 24일 경성치과의학회 학술강연회
2-3 국소마취약의 운동신경섬유 자극 역가에 미치는 「에프에프린」의 영향 
특히 「아드레날린」과의 비교에 대하여, 
제1보고 「벤졸」 및 유도체의 운동신경섬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박명진
제2보고 「페놀」류, 박명진
「칼비톨」의 2, 3 약리학적 실험에 대하여, 박명진, 山口一香  
1939년 9월 24일 경성치과의학회 
주사약 용해제에 관한 2-3의 실험적 연구, 박명진, 山口一香
1940년 9월 22일 경성치과의학회 
금속제제의 치아 및 구강부속조직내 흡수에 관한 실험적 연구, 박명진

 

논문
박명진, 단기간 주조법에 대하여, 경성치과의학회잡지 2권 2호 1933.
박명진, 혈액형 치궁형 및 구개용적과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경성치과의학회잡지 3권 2호 1934.  
박명진, 보철장치의 수학적 관찰, 경성치과의학회잡지 3권 3,4호 1934.
박명진, 아비산의 지각신경 또는 운동신경에 미치는 작용에 대하여, 경성치과의학회잡지 4권 3,4호 1935.
박명진, 2, 3의 지속적 해열작용을 갖는 약물의 진통작용에 대하여, 경성치과의학회잡지 5권 4호 1937.
박명진, 내가 고안한 회전국부교합기에 대하여, 만선지치계 7권 7호 1938.
박명진, 山口一香, 吉村邦一, 시호의 집토끼 체온에 미치는 작용에 대하여, 경성치과의학회잡지 7권 2호 1938.
박명진, 벤졸 및 그 유도체의 운동신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제1보고 벤졸 및 벤졸 핵 수소원자 1개가 단지 알킬기, 할로겐기, 니트로기, 아미드기, 또는 시안으로서 치환시키는 것, 경성치과의학회잡지 7권 1호 1938. 
박명진, 벤졸 및 그 유도체의 운동신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제2보고 Phenol류, 경성치과의학회잡지 8권 3호 1940. 
박명진, 벤졸 및 그 유도체의 운동신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제3보고 안식향산류, 경성치과의학회잡지 8권 4호 1940. 
박명진, 창연제와 연제 투여 집토끼의 구강 내 기관에 의한 창연과 연침착에 관한 분광경적 검색에 대하여(독문), 일본의학집보 약물학 14권 1호 1941. 
박명진, 아드레날린, 피로갈핀 및 아트로핀 투여한 집토끼의 연제투여 후의 구강 내기관에 의한 연침착에 관한 분광경적 검색에 대하여(독문), 일본의학집보 약물학 15권 2, 3호 1942.

 

나. 한성치과의사회

 

박명진은 한국인 치과의사회 설립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1928년 박명진은 장지원·김종찬·남수희· 신인철·이유경·김용봉·이천흥과 같이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한성치과의사회에 입회하여 회를 체계화하게 하였다. 친목기관으로 임상적 토론, 실패담 또는 성공담 등을 교환하던 한성치과의사회는 회를 체계화한 후 학술연구, 구강위생계몽, 회원복리 등을 도모하게 되었다15).
1933년 12월 31일 박명진은 한성치과의사회 총회에서 평의원이 되었다. 회장 함석태는 유임되었고, 부회장 조동흠이 선임되었다. 이사 이동환·이유경·최영식, 평의원 박명진·정보라·김종환·남수희·조경호이 선출되었다16). 
1935년 9월 25일 한국인만의 치과의사회인 한성치과의사회가 조선연합치과의사회에 가맹하였다. 가입 동기는 법정치과의사회가 될 때 한국인 치과의사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후 한성치과의사회는 공식적으로 한국인 치과의사를 대표하는 치과의사회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36년 총회에서는 회장 함석태, 부회장 조동흠이 유임되었고, 이사 정보라·최영식·남수희, 평의원 박명진·안병식·한도수·이수만·김철용이 선출되었다17).
그리고 1933년 6월 3일과 1936년 6월 4일 충치예방일에 참석한 유복진, 조명호, 이창우, 문평국 등도 1928년 이후에 가입된 회원일 것이다18).
1938년 박명진은 한성치과의사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9년 한성치과의사회장 박명진은 한국인 치과의사의 대표기관으로서 각종 행사에 참여하였다. 경성치과용품조합 조합기 입혼식19), 1941년의 치아와 건강전람회20), 조선치과용품상조합이 상업조합령으로 발족식21)에 한성치과의사회는 경성치과의사회와 그 위치를 동등한 수준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후 한국인 치과의사를 대표하는 치과의사회로서 한성치과의사회장은 조선연합치과의사회의 평의원이 되기도 하였다22). 1939년 박명진·박부영이 조선연합치과의사회 평의원이 되었다23). 1940년 박명진은 박부영·최병지·이창용·김찬규·김성도·김상문과 같이 조선연합치과의사회 평의원이 되었다24).
그러나 1942년 10월 1일 한성치과의사회는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인 치과의사 위주의 경성치과의사회와 통합하게 되자, 박명진은 한국인 치과의사의 대표에서 경성치과의사회의 하나의 평의원에 머무르게 되었다25).

 

3. 광복 후


가. 치의학 교육자

 

광복 후 역사 주체로써 자주적인 자아를 실천하는 교육을 하는 스승으로써 박명진은 한국 치의학 교육에 전력을 다하였다. 1945년 11월 무렵 일본인을 모두 송환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는 귀국하기로 결심하고 교직원들과 논의 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의 운영자로 교장에 박명진을 지명하고, 이사, 감사도 선임했다26). 
1945년 11월 1일 박명진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경성치과대학으로 개편하고 학장에 취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명진은 이사회를 조직하여 이사장 문기옥, 정보라(보철부)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유경(보존치과부)은 부속 병원장, 이춘근(구강외과부)이 동참하였다. 치의학교육제도는 일본식에서 미국식 치의학교육제도로 전환하게 되었다27).
1946년 8월 22일 군정법령 제102호인 「국립서울대학교설치령」에 의거하여 박명진, 이유경, 정보라 등은 경성치과대학을 국립서울대학교치과대학으로 편입시키었다28). 이 무렵 박유신, 김수철, 김용관, 김정규가 새로 참여하게 되었다29).
1948년 7월 박명진은 서울대학교 평의원회 위원으로 대학 행정에 관여하기도 하였다30).

6.25동란으로 어려운 중에도 박명진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학장으로서의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1951년 1월 4일 박명진은 부산 창선동 김세존치과의원에 임시 연락사무소로 정하였다가, 다시 2월에 부산 광복동 2가 18번지 김상찬치과의원에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임시 연락사무소로 정하였다31). 
1951년 6월 전시 연합대학이 설치됨에 따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은 의학계열 통합강의를 수강하였다. 1951년 9월 1-2일에 시험을 거쳐 66명의 신입생이 들어왔고, 1951년 11월 18일 부산 대교동 2가 80번지로 연락사무소를 옮겼다32). 
1951년 박명진은 서울대학교대학위원에 피선되어 대학 행정에 관여하기도 하였다33). 
1952년 4월 8일-10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시험을 거쳐 137명의 신입생이 입학했다. 박명진은 김상찬치과의원과 토성동 소재 경찰병원 치과에도 임시 부속병원을 설치하기도 하였다34). 
1952년 5월 26일 전시 연합대학이 해체되고,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은 부산 대청동 4가 2번지 산중턱에 가교사를 건축하여 대강의실, 중강의실 각 1개, 소강의실이 2개, 그 밖에 학장실, 직원실, 숙직실, 창고 등을 갖추었다. 교수진은 점차 추가되어 교수 2명, 조교수 3명, 전임강사 7명, 조교 2명 등 14명과 25명의 시간강사가 재학생 296명(남277, 여19, 학생정원 480)의 학습지도를 담당하였다35). 
1953년 4월초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부속병원은 진료실로 부산 광복동 입구의 김순염 자택 목조 2층 30평을 빌렸다. 나무 기둥에 치과용 엔진을 부착하여 만든 10여대의 간이 유니트와 목조의자 10여대를 설치하여 사용하였고, 10평의 마루는 기재창고로 사용하였다36). 당시 박명진, 김영창, 김동순, 김문조, 김붕순, 전일현, 이영옥, 심태석, 허태운, 장완식, 이유경, 박유신, 김정규, 노광욱, 김수철, 유종덕, 차문호, 이춘근, 오재인, 송재형, 호정진, 김용관, 안형규 등이 근무하였다37).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부산 피난 시절인 1951년 9월 29일 전문부 28명, 1952년 3월 31일 학부 16명, 전문부 3명, 1953년 3월 28일 학부 12명, 전문부 2명을 졸업시키었다38).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 후 1953년 8월 26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은 32개월간의 부산 피난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복귀하였다39).

1953년 6월 8일-1955년 4월 27일 박명진은 이유경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부속 병원장이 사임하자 부속 병원장을 겸직하였다40). 
1954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학장 박명진은 한미재단, 서독국비장학생, 국무성 ICA 원조자금의 도움으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교직원을 미국에 유학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 결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미국 치의학이 직접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41).
1954년 6월 25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학장 박명진은 근속 25주년으로 근속표창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다42). 
1954년 4월 6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학장 박명진은 학술 활동이 인정되어 학술원위원에 피선되었다43). 
1955년 3월 7일-8월 7일 5개월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학장 박명진은 미국교육계를 시찰하였다. 1955년 3월 7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박명진 학장은 미국교육계 시찰을 위하여 선편으로 부산을 떠나 2주일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시애틀로 가서 3월 24일부터 3일간 열린 ADA학회에 참석하여 귀빈대우를 받기도 하였다44). 이후 박명진의 노력으로 한국치과계는 치과기자재를 비롯하여 치의학의 새로운 소식과 도서 등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다45).


나. 치과의사회 활동

 

광복 후 박명진은 치과의사회 설립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그는 조선치과의사회 및 한성치과의사회 준비위원이 되었다. 1945년 9월 5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재경 치과의사 수십 명이 조선치과의사회 및 한성치과의사회 결성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서울 수송초등학교 동측 한 교실에 모였다.
조선치과의사회 및 한성치과의사회 준비위원회 구성에 전형제를 채택하였다. 문기옥 의장은 전형위원으로 조기항, 서병서 등 5명을 지명하였고, 전형위원은 박명진, 안종서, 조명호, 이유경, 정보라, 문기옥, 이형주, 안병식, 김용진, 이동환 등 10명을 준비위원으로 선출하였다46).

1945년 12월 9일 조선치과의사회 설립총회는 경성치과대학 강당에서 재경 치과의사 70여명이 모인 가운데 개최하였다. 박명진은 평의원이 되었다. 
조선치과의사회 임원진 : 위원장 안종서, 부위원장 문기옥, 서무위원 안병식, 기획위원 이유경, 방안자, 보건 및 학술위원 김문조, 정보라, 자재위원 조명호, 문기옥, 조사위원 정도성, 임영준, 재무위원 박부영, 박동석, 
평의원 : 박명진, 조호연, 박용덕, 정용국, 원제신, 이양숙, 홍사근, 최희종, 조기항, 이형주47).  

1945년 12월 16일 한성치과의사회 설립총회는 경성치과대학 강당에서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박명진은 5명의 전형위원 중의 하나가 되어 한성치과의사회 임원 선출에 관여하였다.
한성치과의사회 임원진 : 위원장 김용진, 부위원장 김연권, 서무부 위원 서병서, 김재천, 보건부 위원 김종옥, 최희종, 학술부 위원 이성민, 이형주, 조사부 위원 홍사근, 조기항, 재무부 위원 이동환, 박정식 
평의원 : 박기용, 임영준, 김문조, 안병식, 김정희48).

박명진은 광복 후 조선치과의사회와 서울지회 한성치과의사회의 설립은 그 기원을 1925년에 조직되었던 한성치과의사회가 일본관헌의 간섭으로 1940년에 폐지되었다가 1945년에 조선치과의사회로 다시 발족한 것이라 하였다.

한편 1925년에 조직되었던 한성치과의사회가 일본관헌의 간섭으로 1940년에 폐지되었다가 해방후인 1945년에 조선치과의사회로 다시 발족하여 회장에 안종서, 부회장에 문기옥이 피선되고 서울지회로는 한성치과의사회를 부활시키어 회장에 김용진, 부회장에 김연권이 피선되었고 조선치과학회를 조선치과의사회의 한 기구로 포함시키어 회장에는 박명진씨가 피선되어 각각 운영하였다49).

광복 후  한국의 치과의사들은 어려울 때 서로 도우며 치과의사회를 운영하였다. 
1946년 4월 조선치과의사회 총회에서 위원장에 박명진, 부위원장에 안병식이 선출되었다. 이것은 조선치과의사회 위원장 안종서가 사임하였기 때문이었다50).
1947년 5월 19일 조선치과의사회 정기총회에서 위원장 박명진이 사임하자 안종서가 다시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이 총회는 학회장 박명진, 특별연구위원회 대표위원 조호연, 학회위원 광주 은중기, 대구 서영규, 부산 김순배, 서울 미정 등을 선출하였다51).

1948년 조선치과의사회를 대한치과의사회로 개칭하게 되었다52). 1951년 7월경 6.25동란으로 피난치과의사회(회장 한동찬·촉탁 최효봉)를 조직하였고, 피난치과의사회는 1952년 3월 부산치과의사회에 합류하였다53). 대한치과의사회는 부산 광복동 2가 18번지 김상찬치과의원에 임시 연락사무소를 두게 되었다54).

1951년 9월 5일 법률 제221호로 국민의료법이 공포되고, 동법시행세칙이 1951년 12월 25일 보건부령 제11호로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1952년 3월 16일 국민의료법 제53조에 의하여 법정단체로서의 대한치과의사회는 부산 동광초등학교에서 설립총회를 개최하였다. 
박명진은 대한치과의학회 학회장으로 계속 참여하였다. 그 당시 대한치과의사회에 접수된 서울시와 각 도 치과의사회 임원명단은 다음과 같다. 
대한치과의사회(사무소 부산시 창선동 1가 42 안종서 치과 내)  
회장 안종서, 부회장 이유경, 최해운, 김성도, 총무부 김종옥, 신종윤, 재무부 이성민, 김상찬, 자재부 한오봉, 이원술, 보건부 김영창, 임흥준, 조사부 안기화, 김기환, 학회장 박명진, 학술연구부장 이춘근, 감사 문창주, 김순배, 고문 한동찬, 사무장 최효봉 55)

1957년 박명진은 대한치과의사회의 발전은 지방 회원들의 협조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즉 부산의 김상찬, 김창규, 김순배, 신종윤, 추옥엽 등과 대구의 최해운, 추장엽, 충남의 임주혁, 전북의 임택용, 전남의 노기섭, 조 향, 김성도, 충북의 이세근, 박창희, 강원도의 남궁 규, 경기도의 임영균, 이창용 등은 우리나라 치과의사회를 육성하여 온 공로자들로서 서울에 있는 대한치과의사회와 음으로 양으로 밀접한 연락과 협조로서 금일의 발전을 보게 된 것이라 하였다56).

1957년 서울대학교치과대학 학장 박명진에 의해 대한치과의사협회 회관 마련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서울대학교치과대학 학장 박명진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전 교장 나기라 다쓰미의 도동 소재 사택(대지 140평, 건평80평)을 대한치과의사회 회관으로 기증하였다. 1945년 11월 박명진은 나기라 다쓰미에 의해 서울대학교치과대학 전신인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의 운영자로 교장에 지명되어 그 사택을 관리하고 있었다57).
1957년 5월 11일 제6회 대한치과의사회 정기총회는 회관설치건을 상정하여 논의하고, 도동 소재 사택을 대한치과의사회로 소유권 이전 등기하기로 하였다58).
1958년 10월 16일 대한치과의사회 이사회는 회관문제를 신중히 검토한 끝에 교통이 불편하므로 회관을 매각하기로 결정하였다59). 
1959년 3월 5일 대한치과의사협회 이사회는 박명진으로부터 기증받은 도동의 회관을 1천만원에 매도하고 이전하기로 가결하였다60).
1960년 2월 대한치과의사협회장 안종서는 박명진으로부터 기증받은 사택을 매도하였다61). 
1960년 11월 1일 서울 종로구 낙원동 35번지(대지 60평, 2층 건물)를 대한치과의사협회 회관으로 매수하여 사무실로 사용하였다62).

 

다. 치과의학회 활동

 

광복 후 치과의사회는 치과의학회와 분리되지 않았다. 치과의학회는 치과의사회의 한 기관이 되어 총회 및 학술강연회를 하였다.  
1947년 5월 18일 조선치과의학회 제1회 총회 및 학술강연회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이 총회는 학회장 조호연, 특별연구위원회 대표위원 정보라가 주관하였다63). 
박명진은 아래와 같은 연제와 연자로서 참석하였다. 
금속제의 중독증상이 구강 내 여러 기관에 출현함에 대한 실험적 고찰 : 박명진
개성인삼으로 사육한 작은 쥐의 <니코틴> 중독에 대한 저항력 : 박명진64)

1948년 5월 23일 박명진은 학회장으로 조선치과의학회 제2회 총회 및 학술강연회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강당에서 개최하였다. 1949년 5월 28일 조선치과의학회 제3회 총회 및 학술강연회는 계속되었다65).

1952년 10월 18일 대한치과의학회 제4회 총회 및 학술강연회는 전시 하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부산에 있는 전 회원 및 다수의 지방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가교사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대한치과의학회 학회장 박명진은 총회 및 학술강연회를 주관하였다. 총회에서는 1952년 4월 26일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춘근에게 공로상을 수여하였다66).

1953년 4월 18-19일 대한치과의학회 제5회 학술강연회 및 총회는 양일간 부산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가교사 강당에서 열렸다. 대한치과의학회 학회장 박명진은 총회 및 학술강연회를 주관하였다67).

1954년 6월 20일 대한치과의학회 제6회 학술강연회 및 총회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강당에서 열렸다. 대한치과의학회 학회장 박명진은 총회 및 학술강연회를 주관하였다. 그리고 학회지 발간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조선치과의학회 제7회 총회 및 학술강연회는 기록을 찾지 못하였다68).

1954년 11월 30일 대한치과의학회장 박명진은 치의학 발전이 되기를 회원들과 함께 바라며 대한치과의학회지 제1권 제1호를 발행하였다. 총 174면으로 박명진 학회장은 권두사를 통해 그 기쁨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치의학 발전을 위하여 연구발표회를 6회에 이르기까지 연구업적을 공표하여 학문적 비판을 받을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던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회원들의 학회지 발간을 주창하는 소리가 바야흐로 높아가던 중 6.25동란으로 고달픈 피난생활을 만 3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어려운 때이나 학회지 편집을 촉진시키자 한미재단의 인쇄비 원조의 뜻을 받아 편집담당자는 용기를 얻어 편집을 완성하였다. 우리 치의학 발전이 되기를 회원들과 함께 바라는 바이다69).

1955년 3월 7일-8월 7일 5개월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학장 박명진은 미국교육계를 시찰 도중 미국치과의사회 회장 린치를 만나 대한치과의사회장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1955년 4월 5일 대한치과의사회는 미국치과의사회장 린치 박사로부터 미국치과의사회는 1955년도부터 회원 매인당 5불씩 각출하여 한국 치과계와 치의학도를 돕겠다는 계획이 진행 중에 있다는 회신을 받기도 하였다70).

1956년 4월 22일 대한치과의학회 제8회 총회 및 학술강연회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강당에서 회원 2백여명이 참석하였다. 대한치과의학회 학회장 박명진은 총회 및 학술강연회를 주관하였다. 이번 학회에서 특히 이채를 띤 것은 임상가를 위하여 테블크리닉이 처음 시도되었다71).

 

라. 구강위생계몽, 치과행정과 정책, 전문 과목 표방허가 심사 위원, 산 역사

 

치과의사회의 주요 활동은 학술강연회와 구강위생계몽이었다. 박명진은 구강위생강조주간 행사에 방송연자와 무료진료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6년 6월 9일-15일까지 조선치과의사회는 구강위생강조주간을 설정하여 구강검사, 유치발치, 구강위생계몽강연을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실시한 바 있었다72). 
1947년 6월 9일 제2회 구강위생강조주간 첫날로 박명진, 원제신, 배진극, 정보라, 조명호 등이 구강위생 좌담회를 방송하고, 6월 14일 조선치과의사회 김용진 위원장의 인사와 김문조 작 방송극 “보건생활 첫걸음”을 김문조, 서병서, 김종옥, 김복덕, 김유봉, 이은순 등 출연으로 방송하였다73). 
1948년 구강위생강조주간 행사는 보건후생부 치무과, 조선치과의사회 주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각도 보건후생국 및 각도 치과의사회 후원으로 구강검진, 강연, 방송 등을 실시하였다. 특히 방송에 6월 9일 김용진, 14일 박명진이 각각 15분씩 강연하고, 15일 구강위생사상을 선양하기 위하여 “라디오 극” 방송을  30분간 하였다74).
1956년 7월 8일 대한치과의사회는 구강위생 강조주간사업의 일환으로 무치의촌 순회진료반을 편성하여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의 면민 131명에 대해 무료진료를 하였다. 건치아동들에게는 표창장과 부상을 수여하였다. 진료반원은 김용진, 박명진, 신인철, 이희창, 장병건, 이유경, 이동환, 이성민, 김동옥, 이형주, 이춘근, 장지원, 이수경, 이규명, 이동환, 민병혁, 오응서 등 17명이었다.

1946년 박명진은 치과행정에 참여하였다. 초기 미군정하에 치무국에 치과의사 면허 및 등록위원회(일명 : 치과의사자격 심사위원회)를 두어 위원장 안종서(조선치과의사회 위원장), 위원 겸 상임서기 원제신(치무국장), 위원 박명진(경성치과대학 학장), 위원 정보라(경성치과대학 교수), 위원 이유경(경성치과대학 교수), 위원 문기옥(조선치과의사회 부위원장), 위원 조호연(경성대학 교수) 등을 위촉하고 일제의 면허증을 미군정면허로 갱신 교부하였다75). 
1949년 4월 10일 박명진은 치과정책에 관여하였다. 사회부는 치무분과위원으로 김용진 위원장(대한치과의사회장)을 비롯하여 박명진(서울대학교치과대학장), 이유경(서울대학교치과대학부속병원장), 이형주(여자의과대학 치과학 교수), 안병식(서울치과의사회장), 문기옥(석천치과의원장), 조기항(춘당치과의원장) 등 7명을 위촉하였다. 이 위원회는 사회부에 속하며, 사회부장관의 자문에 응하여 치과행정에 관한 중요정책을 심의하고, 건의할 수 있도록 규정된 기구였다76).

박명진은 전문과목 표방허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하였다. 1952년 11월 보건부는 국민의료법 제41조와 동법시행세칙 제34조에 의거 보건부 내에 의료업자 전문과목 심사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위원회는 위원장 1인, 위원 13인 이내로써 조직한다. 위원장은 보건부 차관이 된다. 위원은 보건부 고급공무원 및 의학, 치과의학에 관하여 특히 해당 전문 과목에 대하여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자 중에서 보건부장관이 위촉한다고 하였다. 이에 치과에는 보철과 박명진, 구강외과 이춘근, 교정과 이유경이 위촉되었다77).

1956년 4월 22일 박명진은 기재소비조합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1955년 4월 23일 대한치과의사회 제4회 정기총회에서 기재소비조합 설립이 가결하였다. 1956년 4월 22일 기재소비조합 설립총회가 있었다. 박명진은 감사로 참여하였다. 
조합장 김용진, 부조합장 이유경, 안병식, 상무이사 이형주, 이사 이성민, 김종옥, 감사 박명진, 이동환, 안기화78)

1955년 12월 10일 박명진은 “역사(歷史)라 함은 그 민족이 걸어 온 역적(歷蹟)을 거짓없이 적어 놓은 것”이라 말하며 “기록을 후세에 전한다는 일은 자랑할 만한 사실만이 가치 있음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에게 경계를 줄만한 사실도 또한 기록 자체의 사명이 큰 것”이라 하였다.

우리가 역사(歷史)라 함은 그 민족이 걸어 온 역적(歷蹟)을 거짓없이 적어 놓은 것을 말함이요 어느 시대나 환경에 따라 사실을 허위로나 또는 과도한 수식을 가한 글은 이미 역사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 사실을 기록한 역사 가운데서 이 지나간 시대에 좋은 인물의 행적이나 바른 처사도 많이 발견 할 수 있으나 그 반면에 악한 인물들의 증오 할만한 사실도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그럼으로 기록을 후세에 전한다는 일은 자랑할 만한 사실만이 가치 있음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에게 경계를 줄만한 사실도 또한 기록 자체의 사명이 큰 것이다79).

이와 같이 학문(學問)에서 정당한 이론과 학설이 새로운 연구발전에 기초가 되고, 그릇된 이론과 착오있는 판단도 새 연구 진행에 자극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80).

박명진은 한국의 치의학과 치과계를 온전히 증거하는 산 역사였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1957년에 발행한 『유네스코 한국총람』에 게재한 「한국의 치과의학」이라는 글에서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한국치의학의 과거, 현재를 기술하고 있었다. 즉 일제강점기 치의학의 도입, 한국인 치과의사의 등장, 치의학 교육, 치과의사 단체의 설립으로 치과의사회와 치과의학회, 한국인 치과의사회, 광복 후 치의학 교육, 치과의사회와 치과의학회, 6.25동란과 치의학 교육에 대한 글을 남기었다. 특히 대한치과의사협회의 기원이 한성치과의사회에 있다고 하였다81).


4. 맺음말

 

박명진 일제강점기의 압박과 굴욕을 참아내었고, 광복의 환희도 잠시 6.25동란의 동족상쟁의 아픔도 겪어야 하였다. 박명진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치과의사라는 전문 직업인으로 치의학을 연구하며, 교육한 스승이었다. 그는 한국인으로 나라와 동포를 사랑하는 바탕 위에 치과의사라는 전문 집단의 상황을 파악하고 치과의사회와 치과의학회에서 활동한 지도자였다.
박명진은 역사 주체로써 확고한 자주적인 자아의 교육, 문화, 종교 등을 건설하여 새롭게 전개되는 세계창조의 주인공으로서 역할을 다하도록 우리의 진로를 인도하는 큰 스승이었다.

다음은 우리의 진로를 인도하는 큰 스승이었던 박명진의 학교와 치과의사회와 치과의학회에서 활동한 내용의 요약이다.
박명진(朴明鎭, 1903∼1957)은 1903년 7월 3일 서울시 양교동에서 박기붕(朴其鵬)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그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 후 조선총독부의원에 의무 부수로 시작하여, 1937년 12월 16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박명진은 경성제국대학 약리학교실에서 연구하고, 1943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수여받았다. 1943년 박명진은 서울 종로 3정목에서 개업을 하기도 하였다.

1928년 박명진은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한성치과의사회에 깊이 참여하여 한성치과의사회를 체계화하게 하였다. 1938년 박명진은 회장이되어 이후 한성치과의사회장 박명진은 한국인 치과의사의 대표기관으로서 각종 행사에 참여하였다.

광복 후 역사 주체로써 자주적인 자아를 실천하는 교육을 하는 스승으로써 박명진은 한국 치의학 교육에 전력을 다하였다. 
1945년 11월 1일 박명진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경성치과대학으로 개편하고 학장에 취임하였고, 1946년 8월 22일 국립서울대학교설치령에 의하여 박명진은 경성치과대학을 국립서울대학교치과대학으로 편입시키었다.

6.25동란으로 어려운 중에도 박명진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학장으로서의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피난 중에도 박명진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서, 신입생을 선발하며, 졸업생을 배출하며, 가교사를 건축하기도 하였다.   
1954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학장 박명진은 한미재단, 국무성 ICA 원조자금 등의 도움으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교직원을 미국에 유학을 보내어 미국 치의학을 한국에 직접 도입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1954년 6월 25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학장 박명진은 근속 25주년으로 근속표창식이 거행되기도 하였고, 1954년 4월 6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학장 박명진은 학술 활동이 인정되어 학술원위원에 피선되었다. 1955년 3월 7일-8월 7일 5개월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학장 박명진은 미국교육계를 시찰하였다.

광복 후 박명진은 치과의사회 설립에 깊이 관여하여 조선치과의사회 및 한성치과의사회 준비위원이 되었다. 1946년 4월 조선치과의사회 총회에서 박명진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52년 3월 16일 법정단체로서의 대한치과의사회가 설립될 때에 박명진은 대한치과의학회 학회장으로 계속 참여하였다. 
1957년 서울대학교치과대학 학장 박명진에 의해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전 교장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의 도동 소재 사택(대지 140평, 건평80평)을 대한치과의사회 회관으로 기증하므로 대한치과의사협회 회관 마련의 기초를 만들었다.

박명진은 조선치과의학회 제1회 총회 및 학술강연회에서 연구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한치과의학회 학회장 박명진은 제2회부터 제8회까지 대한치과의학회 총회 및 학술강연회를 주관하였다. 이 중에는 전시 하의 어려움을 무릅쓴 부산에서 제4회부터 제5회까지 총회 및 학술강연회가 포함되어 있다. 
1954년 11월 30일 대한치과의학회장 박명진은 치의학 발전이 되기를 회원들과 함께 바라며 대한치과의학회지를 발행하였다.

박명진은 치과의사회의 주요 활동 중의 하나인 구강위생계몽, 치과행정과 정책,전문 과목 표방허가 심사 위원, 기재소비조합에 감사로 참여하였다.

1955년 12월 10일 박명진은 “역사(歷史)라 함은 그 민족이 걸어 온 역적(歷蹟)을 거짓없이 적어 놓은 것”이라고 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박명진은 한국의 치의학과 치과계를 온전히 증거하는 산 역사였다. 특히 대한치과의사협회의 기원이 한성치과의사회에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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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중기, 〈한말의 치과업계에 대하여〉,《대한치과의학사연구회지》, 1960. 
임경빈,〈대한치과의사협회와 서울시치과의사회의 기원에 대한 재조명〉,《우듬지》, 2002.
조영수, 〈일본인 치과의사의 조선진출 1893-1910〉, 《대한치과의사학회지》, 1998. 
최정봉, 〈한국치의학계개관〉, 《대한치과의학사연구회지》,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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楢崎東陽,〈조선치과의계의 추억〉,《대한치과의학사연구회지》, 1960. 
大澤義誠,〈조선치과변천이야기〉,《대한치과의학사연구회지》, 1960.
垣見庸三, 〈조선치과의 회상〉,《대한치과의학사연구회지》,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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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田信保,〈경성제국대학의학부 치과학교실의 연역〉,《대한치과의학사연구회지》, 1961.

 

-각주-

1) 신재의,『한국근대치의학사』, 참윤, 2004. 24-25쪽.
2) 신재의,『한국근대치의학사』, 참윤, 2004. 36-37쪽.
3) 신재의,『한국근대치의학사』, 참윤, 2004. 44, 47쪽.
4) 박명진,〈대변자의 역할을 완수하라〉,《조선치계》, 1946. 37-38쪽.
5) 박명진,〈대한치과의학회지 발간호 권두사〉,《대한치과의학회지》, 1954. 3쪽.
6) 박명진,〈우리의 기록〉,《저경지》제1권 제5호, 1955. 6쪽.
7) 박명진,〈한국의 치과의학〉,《대한치과의학사연구회지》, 1960. 6-12쪽.
8) 《朝鮮醫報》,〈雜報 漢城齒科醫師會 役員 改選〉, 1934. 제3권 제4호, 31쪽. 1936. 제6권 제1호 21쪽. 
9) 《滿鮮之齒界》, 1935. 제4권 제7호 42쪽. 제4권 제10호 33쪽. 제11권 제10호 37쪽. 
10) 『대한치과의사협회사』 2010, 439쪽. 《치과연구》 제22권 제6호 46쪽에 생일에 관해서는 1903년 7월 3일의 기록이 있으나 《대한치과의학회지》, 1954. 158쪽과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63쪽에는 1903년 3월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대한치과의사협회사』2010, 439쪽을 따랐다. 
11) 《滿鮮之齒界》, 1935. 제12권 제2호, 11쪽.
12) 《滿鮮之齒界》, 1935. 제12권 제2호, 11쪽. 
13) 《朝鮮齒科醫學會雜誌》, 제10호, 1928. 46쪽. 제18호, 1931. 22쪽.
14) 《滿鮮之齒界》, 1935. 제12권 제2호, 11쪽.
15) 신인철,〈한국근대치의학의 연역〉,《대한치과의학사연구회지》, 1960. 23-24쪽.
16) 《朝鮮醫報》,  3권 4호, 1934. 31쪽. 
17) 《朝鮮醫報》,  6권 1호, 1936. 21쪽. 
18) 《동아일보》,  1933. 6. 3일자, : 《조선중앙일보》, 1936. 6. 4일자
19) 《滿鮮之齒界》, 8권 10호, 1939. 38쪽. 경성치과용품조합 조합기 입혼식 거행
20) 《滿鮮之齒界》, 10권 6호, 1941. 40쪽. 치아와 건강전람회
21) 《滿鮮之齒界》, 10권 10호, 1941. 32-33쪽.
22) 《滿鮮之齒界》, 5권 3호, 1936. 41쪽.
23) 《滿鮮之齒界》, 8권 5호, 1939. 34쪽.
24) 《滿鮮之齒界》, 9권 4호, 1940. 33쪽.
25) 《滿鮮之齒界》, 11권 10호, 1942. 36-37쪽.
 회장 사이토 츠루오(齊藤鶴雄) 
 부회장 츠메다 쿄시로(爪田杏四郞) 정보라 
 평의원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 소토 케이죠(外 圭三)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온다 세이지(音田淸治) 미야모토 노리오(宮本範男) 하누 히로시(羽生博) 
 함석태, 박명진, 이유경, 안종서 
 이사장(겸임) 츠메다 쿄시로(爪田杏四郞) 
 이사  이와모토 켄지(岩元健兒) 와카마츠 시게요시(若松重義). 이와세 세이존(岩瀨淸尊) 
 모모사기 타케히라(百崎武平) 타구치 모리아끼(田口盛毅)
26) 경성치과대학동창회, 『京城齒科大學沿革史』, 1964. 11쪽.
27) 『서울대학교치과대학사』 1922-1991, 1991. 40쪽.
28) 《동아일보》 1946. 7. 23일자
 박명진은 “전체로 보아 반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본교로서는 기왕에 관립을 희망하고 있던 만큼 적의한 조치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29) 『서울대학교치과대학사』 1922-1991, 1991. 42쪽.
30) 서울대학교치의학대학원 박물관 소장 약력
31) 『서울대학교치과대학사』제2권 1922-2001, 2002. 72쪽.
32) 『서울대학교치과대학사』제2권 1922-2001, 2002. 72-73쪽.
33) 서울대학교치의학대학원 박물관 소장 약력
34) 『서울대학교치과대학사』제2권 1922-2001, 2002. 73쪽.
35) 『서울대학교치과대학사』제2권 1922-2001, 2002. 73쪽.
36) 『서울대학교치과대학사』제2권 1922-2001, 2002. 73쪽.
37) 『서울대학교치과대학사』제2권 1922-2001, 2002. 77쪽.
38) 『서울대학교치과대학사』제2권 1922-2001, 2002. 74쪽.
39) 『서울대학교치과대학사』제2권 1922-2001, 2002. 78쪽.
40)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213쪽. 
41) 『서울대학교치과대학사』제2권 1922-2001, 2002. 79쪽.
42) 《대한치과의학회지》, 1954. 158쪽.
43) 『대한치과의사협회사』 2010 ,439쪽. 
44)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77쪽. 
45) 이병태, 『나는 인터뷰를 좋아한다.』미발표 원고에서 발췌
46) 《朝鮮齒界》, 1946. 86-87쪽.
47) 《朝鮮齒界》, 1946. 87-88쪽.
48) 《朝鮮齒界》, 1946. 89쪽.
49) 박명진,〈한국의 치과의학〉,《대한치과의학사연구회지》, 1960. 10쪽.
50)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224쪽.
51)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50, 224쪽.
52)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46쪽.
53)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69쪽.
54)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69쪽.
55)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69-70쪽.
56) 박명진,〈한국의 치과의학〉,《대한치과의학사연구회지》, 1960. 12쪽.
57)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81쪽.
58)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81쪽.
59)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81쪽.
60)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282쪽.
61)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101쪽.
62)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101쪽.
63)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224쪽.
64)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240쪽.
65)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238쪽.
66)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71쪽.
67)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71쪽.
68)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75쪽.
69)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76쪽.
70)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77쪽.
71)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79쪽.
72)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49쪽.
73)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49쪽.
74)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49쪽.
75)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47쪽.
76)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61쪽.
77)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72쪽.
78)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사』 1980. 89쪽.
79) 박명진, 〈우리의 기록〉《저경지》제1권 제5호, 1955년 12월 10일, 6쪽.
80) 박명진, 〈우리의 기록〉《저경지》제1권 제5호, 1955년 12월 10일, 6쪽. 

81) 박명진, 〈한국의 치과의학〉,《대한치과의학사연구회지》, 1960. 4-12쪽.